자크 랑시에르는 1940년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1960년에 파리 고등 사범 학교에 입학했고, 폴 리쾨르의 지도 아래 청년 마르크스에 대한 논문을 썼다.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을 받아 『자본』 읽기 세미나에 참석했으나 68혁명 이후 그와 사상적으로 단절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19세기 노동자 및 유토피아주의자의 문서고를 살펴 그들의 말과 사유를 추적함으로써 박사 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들의 밤』이나 『철학자와 그의 빈자들』, 『무지한 스승』 같은 저작을 내놓았다. 1990년대 들어 평등, 정치, 민주주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불화』 등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미학/감성론과 정치의 관계에 더 집중하며 『감성의 분할』(원제 『감각적인 것의 나눔』), 『문학의 정치』, 『영화적 우화』, 『이미지들의 운명』, 『아이스테시스』 등을 출간했다.
자크 랑시에르 철학의 두 축은 ‘정치의 미학’과 ‘미학의 정치’다. 정치는 권력을 위한 투쟁이나 권력 행사가 아니다. 정치란 각자에게 자리를 할당하고 그 자리에 맞게 감각하고 사유하고 존재하게 만드는 나눔의 방식(치안)에 맞서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미학/감성학적이다. 미학은 예술 이론 일반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 방식들을 분류하고 장르들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재현적 체제와 달리 주제, 장르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예술의 종별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예술 식별 체제를 가리킨다. 예술은 예술로서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개입함으로써 나름의 정치를 갖는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은 정치의 미학과 미학의 정치의 경첩에 해당한다. 그것은 공동체의 공통적인 것을 감각적으로 구획하는 것(시간들과 공간들, 말과 소음,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구획)이니만큼 누가 공통의 것에 참여하는가/몫을 가지는가, 무엇이 눈에 보이게끔 편제되는가를 둘러싼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는 랑시에르가 노동자들의 문서고를 뒤진 결과이며, 독자는 그의 책 속에서 쉼 없이 소환되는 19세기의 (비)동시대적 형상들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또한 랑시에르의 주장이 정치의 심미화(발터 벤야민)나 작가의 앙가주망(사르트르) 같은 관념과 구별되는 방식에 주목함으로써 독자는 그의 철학의 독창성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의 철학에 입문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의 ‘말’을 듣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터뷰집들(『지친 사람들에게는 유감이지만』과 『평등의 방법』)이 국내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다른 길을 택해야 한다. 먼저 『합의의 시대를 평론하다』를 집어 들기를 권한다. 이 책은 랑시에르가 브라질의 어느 일간지에 기고한 시론들을 모은 것이다. 랑시에르는 철학자들의 텍스트를 주해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덧붙이는 편도 아니고, 자신의 개념들을 엄밀히 정의하며 체계를 세우는 철학자도 아니다. 철학, 정치, 역사, 영화, 문학, 미술 전시 등을 두루 살피며 분과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글쓰기는 독자들의 높은 교양을 요구한다. 여기에 이른바 ‘문청’이었던 랑시에르의 문체까지 더해져 그의 책을 읽는 것은 이중 삼중으로 고된 일이다. 따라서 랑시에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스타일에 적응해야 한다. 『합의의 시대를 평론하다』에 수록된 글들은 랑시에르의 스타일을 잘 보여 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분량이 짧아 그의 글에 적응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랑시에르의 초기 문제 틀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책은 『무지한 스승』이다. 랑시에르는 68혁명 이후 알튀세르의 이론적 실천론이나 이데올로기론의 문제점을 자각하고 자신의 스승과 떠들썩하게 결별했다. 자신이 왜 그리고 어떻게 지배받는지 알지 못하는 대중과 이론적 실천을 통해 지배 메커니즘을 깨달은 지식인의 구분, 후자가 전자에게 그 진실을 ‘설명’해 주면 대중은 해방될 수 있다는 관념. 랑시에르가 알튀세르에게서 문제 삼은 것은 그러한 과학주의가 상정하는 (대중의) 무능력의 고리였다. 반대로 랑시에르가 노동자 운동의 문서고에서 발견한 것은 비참한 노동 조건 속에서 뱉어 내는 한숨이나 그들끼리 형성한 하위문화가 아니라 모두와 똑같이 읽고, 쓰고, 말하고, 사유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들의 자기 해방이었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조제프 자코토라는 인물의 지적 모험을 통해 지적 능력과 해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자코토는 루뱅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몰랐고, 자코토는 학생들에게 설명하는 데 필요한 네덜란드어를 알지 못했다. 자코토는 학생들에게 『텔레마코스의 모험』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본을 쥐여 주고 학생들이 스스로 익히도록 한 뒤 쉼 없이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설명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스승’이 어떤 의미에서 학생들의 앎의 원인이 되는지, 이 논리가 지적 능력의 평등 혹은 불평등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학생 스스로 지적 해방을 이룰 수 있다면 스승의 역할은 무엇인지, 사회적 차원에서 제도를 통해 지적 해방이나 평등을 이루는 프로그램이 가능한지 등이 『무지한 스승』의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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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의 독특성은 전통적인 정치 철학 개념들, 예컨대 정치와 정치적인 것, 평등, 민주주의 등을 전혀 다르게 사유한 데 있다. 랑시에르가 쓴 정치 관련 저작을 읽기 전에 독자는 자신의 통념을 내려놓을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책은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원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다. 이 책의 제목은 인민 권력에 기초한 제도가 아니라 인민과 그들의 습속에 불만이 있는 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민주주의적 삶이라 불리는 이 습속은 정치에 무관심하고 정치 참여도 안 하다가(공공선의 구축을 방해하다가) 개인의 욕망과 관련된 일에는 너도나도 나서는 인간(탐욕적 소비자)의 모양새를 가리킨다.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인민의 습속과 연결시켜 비판하는 전범을 플라톤에게서 찾는다. 플라톤의 가르침은 국가 차원의 제도와 법을 사회 차원의 도덕과 관습과 조화시키려는 공화주의로까지 이어진다. 이 흐름에 맞서 랑시에르는 플라톤의 말마따나 민주주의란 ‘통치할 어떤 자격도 갖지 않은 아무나의 통치’라고 응수한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 부분은 근대 이후로 불가피한 대안으로 간주되는 대의 민주주의를 모순 어법이라며 비판하는 부분, 인민 주권과 대의제의 혼합으로 유지되는 과두제(“우리는 과두적 법치 국가 안에 살고 있다”)에 대한 비판적 분석,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나누고 공적 영역을 사유화하는 통치 전략에 맞서는 정치에 대한 논의 등이다. 랑시에르 정치론의 진면목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와 『불화』를 함께 읽어야 한다. 두 저작은 저술 시기상 이어져 있고 중요 개념과 논거를 공유한다. 또한 전자의 3부에는 후자를 요약하는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가 수록되어 있는 만큼 두 책은 상호 보완 관계에 있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랑시에르가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더불어 모든 사회 해방의 약속이 좌초된 시대, 역사의 종언 혹은 정치의 종언/회귀가 선언되던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정세에 개입하기 위해 쓴 저작이다. 내분은 끝이 났고 공동체 내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일만 남았다는 입장과 잔존하는 계급 착취 현실을 들어 실질적 민주주의와 형식적 민주주의를 맞세우는 입장, 이 두 입장 사이에서 랑시에르는 민주주의, 평등, 공동체를 다시 사유한다. 랑시에르는 이 책에서 전통 정치 철학이 꿈꾸던 중심/중도의 유토피아부터 오늘날의 탈정치 담론에 이르기까지 정치를 제거하려는 일관된 시도를 비판하고, 1830~1840년대 노동자들이 어떻게 공적 공간의 구성원으로서 스스로를 긍정하기 위해 자신의 논변을 구사했는지를 보이며, 정치(적 주체화)와 치안을 구분한 뒤 그 두 원리가 충돌하는 장으로서 정치적인 것을 설정한다. 『불화』는 명실공히 랑시에르 철학의 본령이다. 정세에 대한 개입이 두드러지는 다른 책들과 달리 이 책은 랑시에르의 개념 지도가 펼쳐지는 본격 저작이다. 각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주는 것이 정의라는 관념(플라톤), 목소리와 말의 구분을 통해 공동의 것의 나눔을 규정하는 질서(아리스토텔레스)를 문헌학적으로 검토하고, 공동체의 부분/몫으로 셈해지지 않은 것을 셈하는 것이 어떠한 논변과 주체화 양식을 통해 ‘불화’와 ‘계쟁’을 낳는지, 그것이 어떤 점에서 정치의 핵심인지를 보이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여기에 서구 정치 철학의 세 형상인 아르케 정치, 유사 정치, 메타 정치에 대한 분석이 뒤따르고, 정치적인 것의 종언과 회귀라는 동전의 양면 속에서 오늘날 득세한 합의 민주주의라는 지배 담론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분리해 내는 작업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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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관련 저서들을 나중에 읽기를 권하는데, 그 까닭은 그것들이 저술 시기상 뒤에 오기 때문만은 아니다. 랑시에르의 미학 저작들은 특유의 낯선 개념과 문체로 이루어져 있고,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영상이나 전시를 사례로 들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국역본들의 난해함도 한몫한다. 따라서 랑시에르에 친숙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책들을 손에 쥐면 프랑스산 철학에 대한 편견만 확인할 가능성이 높다. 『감성의 분할』에서 랑시에르는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아방가르드 개념 등이 지난 세기 새로운 예술 형태를 사유하는 데 과연 도움이 되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20세기 미술사학의 지배 담론을 근본적으로 의문에 부치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제시하는 예술에 대한 세 가지 주요 식별 체제 ? 이미지들의 윤리적 체제, 기예들의 시학적/재현적 체제, 예술의 미학적 체제 ? 가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 독자들이 직접 판단해 보자. 랑시에르는 이 밖에도 반재현적 미술이나 기계 복제 예술, 심지어 익명인들의 평범한 삶에 주목하는 신사학은 모두 사실주의 문학에 의해 가능했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펼친다. 이는 미술, 사진, 영화, 역사 등을 모두 ‘글쓰기’의 범주에서 바라보는 랑시에르의 관점에서 연유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문학의 정치』로 넘어가는 것이 좋다. 『문학의 정치』는 『불화』에 비견될 만큼 중요한 저작이다. 문학의 정치는 작가의 정치 참여도 아니고 저술 속에서 사회 구조를 정치적으로 표상하는 방식도 아니다. 문학의 정치란 문학이 문학으로서 감각적인 것의 나눔에 개입하는 것인바, ‘문학으로서 문학’이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랑시에르에게 문학이란 글로 쓰인 모든 것 또는 문인들의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19세기부터 생겨난 특정한 글쓰기 기교를 가리킨다. 여기서 랑시에르는 플라톤의 문자와 말의 구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등장하는 이야기와 시의 구분 등으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서구의 글쓰기 체제를 지배했던 논리를 탐사한다. 주제, 사용하는 낱말, 표현 방식의 등가성에 기초한 민주주의적 글쓰기, 말 없는 사물들의 표면에 씌어진 말, 모든 의미 작용에서 벗어난 분자 층위의 강도에 대한 포착,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정치 또는 글쓰기 체제가 공존하며 갈등하는 것이 문학의 정치라는 것이 랑시에르의 주장이다. 또한 랑시에르가 문학의 (메타)정치와 정치적 주체화로서의 정치를 구별하는 방식, 그리고 문학의 (메타)정치가 여타의 인문 과학의 토대가 되었던 방식에 주목하도록 하자. 『미학 안의 불편함』의 화두는 “미학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작동 체제로서, 담론의 모태로서, 예술의 고유성을 식별하는 형태로서, 감각적 경험 형태들 사이의 관계들의 재분배로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밝히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숭고의 미학이나 관계적 예술 같은 관념이 사실은 미학의 정치 안에서 갈등하는 두 가지 정치임을 밝힌다. 이 책에서 랑시에르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 예술 식별 체제의 구별이나 정치의 미학과 미학의 정치의 구분 등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는 만큼,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랑시에르의 미학론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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