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본관은 경주(慶州)다. 초명은 지공(之公)이고 자는 중사(仲思)이며, 호는 익재(益齋)와 역옹을 사용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숙했고 글을 잘 지었는데, 1301년(충렬왕 27)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1등으로 합격한 뒤 이어서 과거에 합격했다.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과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1311년(충선왕 3)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었다. 1314년(충숙왕 1)에 충선왕이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그를 불렀다. 이로부터 6년 동안 원나라에서 머물렀는데,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 등의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또한 세 차례에 걸쳐 중국 내륙을 여행했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아미산(峨眉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3개월 동안 다녀왔으며, 1319년에는 절강성(浙江省) 보타사(寶陀寺)로 원나라 황제의 향을 하사하러 간 충선왕을 모셨다. 세 번째는 그가 고려로 돌아온 이후인 1323년의 유람이다. 1320년 충선왕이 참소로 토번으로 유배되자 이제현은 직접 이를 해명하는 글을 올렸으며 이에 충선왕은 좀 더 가까운 유배지인 감숙성의 타사마(朶思麻)로 옮겨졌는데, 이때 충선왕을 만나러 다녀왔다.
이제현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며, 1324년 밀직사를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1339년 재상인 조적(曹)이 난을 일으키자 충혜왕이 진압했지만 잔당의 무고로 충혜왕은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이때 이제현이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로 가서 사태를 수습하고 왕이 복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몇 년간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은둔하며 ≪역옹패설≫을 저술했다.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으며, 정치 기강을 바로잡으려 개혁안을 제시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은 뒤 원나라로 가서 왕기(王祺 : 훗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한 뒤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했다. 이후 계속 사임과 등용을 반복하다가 1357년에 사임을 허락받았으며 1362년 홍건적의 난 때 청주까지 공민왕을 호종해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고, 1367년 81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빼어난 유학 지식과 문학 소양을 바탕으로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했고, 만년에는 ≪국사(國史)≫ 편찬에 힘썼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그는 당시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안녕과 사회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대체로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했기 때문에, 당시 원나라와 고려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대처를 잘해 화를 입거나 유배를 당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