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여자대학교 중국어문·문화학과 교수
한국외국어교육학회 연구이사
한국중국어문학연구회 학술이사
- 저서 및 역서
설문해자와 중국고대문화(학고방, 2010)
한자 문화학(연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동서양 문자의 성립과 규범화(한국문화사, 2014)
10대에게 권하는 문자 이야기(글담출판, 2016)
세계인이 바라보는 한글(한국문화사, 2016)
한자구형학개론(한국문화사, 2020)
‘한자구형학’ 이론
한자구형학(漢字構形學)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에 뿌리를 둔 ‘구조-기능주의’ 이론을 토대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정립된 중국 한자학의 학문영역이다. 한자의 본체인 ‘형태(形)’에 초점을 맞추고 한자의 형태가 구성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연구하며, 그 이론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한자의 ‘체계성’이다.
체계성은 “단위들이 일정한 원리가 지배하는 관계에 의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한자를 구성하는 단위를 찾아내어 그 개념을 규정하고 각 단위가 맺는 다양한 관계를 밝혀내며, 관계를 지배하는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한자구형학의 연구 목적이다. 이 책에서는 ‘한자구형학’의 개념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한자의 형태가 특정한 근거에 따라 구성되고 변화하는 법칙을 연구하는 기초 학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법칙은 낱글자의 구성 방식과 한자의 형태 구성 체계의 법칙을 포괄한다. 한자구형학은 일종의 기술(description) 학문이다.”
촘스키는 언어연구의 결과를 평가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하는 세 단계로 ‘관찰’, ‘기술’, ‘설명’을 제시하였다. 연구 자료에서 연관된 사례를 수집하여 관찰하고 규칙을 발견하여 기술하며 이러한 규칙을 지배하는 원리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 이것은 언어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이자 핵심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한자구형학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기 위해서 이 세 단계를 철저히 적용하고 있다. 특히 주의 깊게 볼 내용은 한자구형학의 이론을 ‘기술’하고 그 원리를 ‘설명’하기 전에, 한자의 각 단위 및 단위 간의 관계에서 ‘관찰’해낸 각종 현상이다. 이 책에는 이러한 현상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사례를 유형별로 분류하고 각종 문자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자구형학 이론은 일반 한자학의 이론을 토대로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의 독자는 한자구형학의 전문적인 이론뿐만 아니라, 한자학의 기초이론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자구형학’의 용어들
한자구형학의 내용이 확장되고 새로운 이론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많은 신생 용어가 출현하였으며, 일반 한자학의 용어는 이미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일부 용어를 제외하고 다양하게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한자학의 통일된 용어 체계가 미흡한 상황에서 그 원론적인 내용을 기반으로 이론적으로 새롭게 개척한 한자구형학의 용어를 번역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 책의 원제는 <漢字構形學導論(한자구형학도론)>이다. ‘導論(도론)’은 ‘사물의 이치를 설명하는 문장 또는 이론’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어떤 학문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글’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 단어는 우리말에서 쓰이지 않는 한자어다. 게다가 한글로 ‘도론’이라고 쓴다면 ‘쓸데없는 이론이나 논의’를 뜻하는 ‘도론(徒論)’으로 오인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원제인 <한자구형학도론>을 번역서의 제목에 그대로 가져다 쓰지 않고 <한자구형학개론>으로 고쳤다.
‘構形(구형)’은 ‘형태를 구성하다’, ‘형태 구성’, ‘구성된 형태’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漢字構形學(한자구형학)’을 ‘한자형태구성학’ 또는 ‘한자형태구조학’으로 번역하면, 한자의 형태를 구성하는 과정, 그리고 구성된 형태의 분석 과정에서 발견한 다양한 현상 및 원리를 포괄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말 독음을 적용하여 ‘한자구형학’으로 번역하였다. 이같이 적합한 번역어를 찾지 못한 것은 우리말 한자어 독음으로 변환하여 사용하였다.
‘構形(구형)’은 본문의 맥락에 따라 주로 명사형 용어를 사용하여 ‘형태 구성’ 또는 ‘구성 형태’로 번역하였다. 構形(구형) 외에 출현 빈도가 높은 용어는 ‘構意(구의)’이며, 이 책의 ‘용어표’에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한자의 형태에서 분석한 의미 정보다. 애초에 글자를 만들 때 그러한 형태로 구성한 의도를 말하며, ‘제자 의도(造字意圖)’라고도 한다.”
構意(구의)는 글자 형태에 구성된 또는 반영된 의미이며, 본문에는 대체로 명사형의 ‘구성 의미’로 번역하였다.
한자구형학의 용어가 한자학의 전문 용어로 존립하려면 개념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構形(구형)’, ‘構意(구의)’ 같이 우리말의 대응어가 없는 용어는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말로 풀이하는 방식을 적용하였다.
개별 학문영역에서만 소통할 수 있는 용어는 학문 간의 경계를 높이므로, 일부 용어는 일반언어학에서 소통 가능한 개념을 찾아서 번역하였다. 예를 들어, 글자로 사용되는 구건(構件)을 지칭하는 ‘成字構件(성자구건)’은 ‘자립구건’으로 번역하고, 단독으로 사용될 수 없고 다른 구건에 의존하여 의미를 나타내는 구건을 지칭하는 ‘非成字構件(비성자구건)’은 ‘의존구건’으로 번역하였다.
또 다른 예로, ‘獨體字(독체자)’와 ‘合體字(합체자)’는 한자의 형태를 분석하는 데 사용되는 기본 용어이며, 일반적으로 우리말 한자어 독음인 ‘독체자’와 ‘합체자’로 통용되고 있다. 독체자는 하나의 글자로 구성된 글자이고, 합체자는 두 개 이상의 글자가 조합된 글자이다. 이 두 가지 용어는 언어학의 단일어와 합성어에 착안하여 ‘단일자’와 ‘합성자’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은 한자구형학에서 제시한 한자의 11가지 구성 방식에 사용된 ‘合成字(합성자)’라는 용어에도 부합한다.
한자구형학 용어들의 우리말 번역은 이 책의 ‘용어표’와 번역서에서 보충한 ‘중한 용어 대조표’를 참고할 수 있다.
번역을 마치며
<한자구형학개론>은 <설문해자와 중국고대문화>, <한자문화학>에 이은 역자의 세 번째 한자학 관련 번역서다. 그리고 <한자구형학개론>은 <한자구형학강좌>(2002, 상해교육출판사), <한자구형학강좌>(2013, 대만: 삼민서국)에 이은 이 책의 세 번째 번역 작업이다.
소책자로 출판된 <한자구형학강좌>(2002)를 번역하였으나 우리말 번역본(2011)이 이미 출간되어 있었다. 그 후로 <한자구형학강좌>(2002)의 증보판인 타이베이본 <한자구형학강좌>(2013)를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문자연구사업단의 번역 총서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2019년 가을에 번역을 마치고 최종본의 탈고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자구형학강좌>(2013)의 책 제목에 대해 저자와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 책의 증보판인 <한자구형학도론>(2015, 상무인서관)이 출판된 것을 알게 되었고, 저자의 권유로 <한자구형학도론>을 번역하여 출판하기로 하였다. 2019년 10월부터 다시 새로운 원서와 대조하며 틈틈이 번역하여 완성된 원고는 <한자구형학강좌>(2013)보다 A4 용지 5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 추가되었다.
‘학문’은 ‘지식을 배워서 익히다’ 또는 ‘일정한 이론을 바탕으로 전문적으로 체계화된 지식’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학문의 의미는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보다는 체계적으로 갖추고 있는 완성형의 ‘학식’에 편향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박사학위를 마치고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학문하다’라는 말로 자신을 수식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때마다 ‘학문’을 한자 ‘學問’으로 바꾸고 그 의미를 새롭게 풀이해본다. ‘배우며 의문을 갖는다’. 이때의 ‘학문’은 습득한 지식을 배경으로 각종 현상에 의문을 갖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한자구형학도론>(2015)은 2019년 중국의 ‘중화 학술 외국어 번역 지원 사업(國家社科基金中華學術外譯項目)’의 학술서적으로 선정되었다. 기나긴 번역 작업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학술적으로 더욱 완성된 한자구형학의 이론서를 번역하여 출간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설문해자>에 근간을 둔 한자의 체계성에 대한 저자의 신념과 그에 따른 연구가 깊어졌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론적인 문제의 해결에서 ‘관계’와 ‘근거’, ‘증명’, 이 세 가지의 유기적 개념을 되새기게 되었다.
출판을 허락해주신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문자연구사업단과 한국문화사의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한자구형학의 기초이론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