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의 교육자이다. 1873년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총리교섭사무아문의 주사로 근무했고, 1906년부터 1907년까지 평리원 재판장서리를 겸임하였다. 1904년에는 이준, 유성준, 전덕기, 박정동 등과 함께 국문교육회를 조직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