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적 삶의 불가피한 현실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장자와 공자는 마주친다. 그러나 장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다”(『논어』)고 생각한 공자의 자리에서, 어쩌면 공자가 멈춘 그 자리에서 공자를 더 밀고 나갔다. 세상이 무도無道한 게 정말 인의仁義가 없어서인가? 오히려 인의 때문에 세상이 더 무도해지는 것은 아닐까? 빈천은 견뎌도 오욕은 견디지 못하는 군자, 목숨은 초개처럼 버려도 명분은 버리지 못하는 군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그런 의욕 자체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아닐까? 장자가 자신의 사유를 출발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또 한 명, 장자의 벗 혜시惠施! 고대 중국 최초의 논리적 사변가인 혜시의 담론을 장자는 한편으로는 존중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지없이 비틀어 버린다. 장자가 보기에 만물이 하나라는 것은 그렇게 “머리를 수고롭게 하면서 따지는” 관념의 문제가아니라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하면서[安命] 그 운명을 껴안고 한바탕 노는 능력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세
상의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삶이라도 다시 살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절대 자유의 삶이다.”
중산층을 조금만 벗어나 생각해 보면 사정이 달라진 것 같다. 혹시 가족주의는 이미 도처에서 삐거덕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륜과 이혼을 그린 숱한 드라마나 영화의 흥행 성공이, 대부분의 청년이 겪는 취업과 연애의 난관이, 한편에서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다른 한편에서의 백래시가 그걸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 지난 몇 년간 청년들과 일을 하면서 나는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청년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우리 세대가 청년시절에 경험했던 사회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점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하기 힘든 조건에 처해 있는 청년들에게 핵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게 딱히 유효할까, 라는 자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 물론 가족주의는 욕망의 배치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꼭 이성애 핵가족에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에 대한 새로운 질문, 새로운 접근,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난겨울 한국도서관협회 ‘길 위의 인문학’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큰 주제는 ‘팬데믹 시대의 일상의 인문학’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반 일리치를 선택했다. 근대사회에서 우리가 저지른 일들을 차분하게 분석하고 포스트 코로나를 생각해 보는 데 일리치만큼 좋은 사상가는, 적어도 나에겐 없었다. 그리고 강의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슬픔과 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희망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의 말처럼, 정치적 선택이다. 한 치 앞이 내다보이지 않을 때도 한 발을 떼는 것, 희망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정치적 행동이다. 나는 여전히 이반 일리치, 데이비드 그레이버, 김종철 선생님 같은 스승들과 함께 이 길에 서 있다. - ‘머리말’ 중에서
세속적 삶의 불가피한 현실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장자와 공자는 마주친다. 그러나 장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다”(『논어』)고 생각한 공자의 자리에서, 어쩌면 공자가 멈춘 그 자리에서 공자를 더 밀고 나갔다. 세상이 무도無道한 게 정말 인의仁義가 없어서인가? 오히려 인의 때문에 세상이 더 무도해지는 것은 아닐까? 빈천은 견뎌도 오욕은 견디지 못하는 군자, 목숨은 초개처럼 버려도 명분은 버리지 못하는 군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그런 의욕 자체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아닐까? 장자가 자신의 사유를 출발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또 한 명, 장자의 벗 혜시惠施! 고대 중국 최초의 논리적 사변가인 혜시의 담론을 장자는 한편으로는 존중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지없이 비틀어 버린다. 장자가 보기에 만물이 하나라는 것은 그렇게 “머리를 수고롭게 하면서 따지는” 관념의 문제가아니라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하면서[安命] 그 운명을 껴안고 한바탕 노는 능력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세
상의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삶이라도 다시 살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절대 자유의 삶이다.
세속적 삶의 불가피한 현실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장자와 공자는 마주친다. 그러나 장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다”(『논어』)고 생각한 공자의 자리에서, 어쩌면 공자가 멈춘 그 자리에서 공자를 더 밀고 나갔다. 세상이 무도無道한 게 정말 인의仁義가 없어서인가? 오히려 인의 때문에 세상이 더 무도해지는 것은 아닐까? 빈천은 견뎌도 오욕은 견디지 못하는 군자, 목숨은 초개처럼 버려도 명분은 버리지 못하는 군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그런 의욕 자체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은 아닐까? 장자가 자신의 사유를 출발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또 한 명, 장자의 벗 혜시惠施! 고대 중국 최초의 논리적 사변가인 혜시의 담론을 장자는 한편으로는 존중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지없이 비틀어 버린다. 장자가 보기에 만물이 하나라는 것은 그렇게 “머리를 수고롭게 하면서 따지는” 관념의 문제가아니라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하면서[安命] 그 운명을 껴안고 한바탕 노는 능력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세
상의 어떤 운명이라도 사랑할 수 있다면, 세상의 어떤 삶이라도 다시 살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절대 자유의 삶이다.
“아, 이 좁은 골목에서 루쉰과 그의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구나. 뭔가 벅찬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마침 그 골목에 나와 앉아 우리의 소란을 보고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자기 집을 보여 주겠다고 나서신다. 마치 한국말을 알아들으신 것처럼. 할머니를 따라, 수십 년 동안 살고 계신다는 그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난 여행 중 처음으로 약간 울컥했다. 그곳이 너무 좁아서, 루쉰이 이런 곳에서 살았겠구나 싶어서, 그리고 여전히 이런 곳에서 누군가 평범하고 남루한 일상을 이어 가는구나 싶어서. 비로소 루쉰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중산층을 조금만 벗어나 생각해 보면 사정이 달라진 것 같다. 혹시 가족주의는 이미 도처에서 삐거덕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륜과 이혼을 그린 숱한 드라마나 영화의 흥행 성공이, 대부분의 청년이 겪는 취업과 연애의 난관이, 한편에서의 페미니즘 리부트와 다른 한편에서의 백래시가 그걸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특히 지난 몇 년간 청년들과 일을 하면서 나는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청년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우리 세대가 청년시절에 경험했던 사회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점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하기 힘든 조건에 처해 있는 청년들에게 핵가족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게 딱히 유효할까, 라는 자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 물론 가족주의는 욕망의 배치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꼭 이성애 핵가족에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에 대한 새로운 질문, 새로운 접근,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난겨울 한국도서관협회 ‘길 위의 인문학’에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큰 주제는 ‘팬데믹 시대의 일상의 인문학’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반 일리치를 선택했다. 근대사회에서 우리가 저지른 일들을 차분하게 분석하고 포스트 코로나를 생각해 보는 데 일리치만큼 좋은 사상가는, 적어도 나에겐 없었다. 그리고 강의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슬픔과 비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희망은,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의 말처럼, 정치적 선택이다. 한 치 앞이 내다보이지 않을 때도 한 발을 떼는 것, 희망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정치적 행동이다. 나는 여전히 이반 일리치, 데이비드 그레이버, 김종철 선생님 같은 스승들과 함께 이 길에 서 있다. - ‘머리말’ 중에서
“삶의 지평에서 죽음을 허겁지겁 감추고, 몸의 리듬에서 질병을 완벽히 추방하여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한 상태’(세계보건기구)라는 ‘정상성’을 삶의 목표로 제시하는 생명 권력의 시대에 건강하지 않은 노인이 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수치가 된다.
그렇다면 ‘엄마처럼 늙지 않을래!’라는 바람만으로 다른 노년을 맞을 순 없지 않을까? 나는 어머니를 통해 나의 나이듦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잘 걷지도 못하고 눈도 잘 안 보이고 귀도 잘 안 들리는 상태가 되었을 때도 명랑한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질병과 나이듦에 대한 사색, 그리고 일상의 재구성 없이는 불가능한 게 아닐까? 나는 『장자』가 원 출전인 양생이라는 오래된 단어를, 건강해지라는 사회적 명령, 관리하라는 자본의 유혹에 맞서 스스로 삶을 돌보고 가꾸는 기예로 다시 번역해 우리 삶의 전면에 배치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