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바로 패배한 정의와 탄압 받는 진실의 편에 섰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다. 순간의 이익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의 이야기이다. 역사가 현실의 승자가 아니라 가치의 승자를 기록하는 이유를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느낄 수 있다면 한 역사학자로서 그 이상 다행이 없겠다.
일제 식민사관과 중화 패권주의 사관의 구각을 깨고 바라보면 비로소 기마민족 국가 고구려가 보인다. 그러면 대륙이 보이고, 또 앞길을 가로막은 부여의 엄리대수에게, "나는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신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연결하고 가북은 떠올라라"라고 말한 추모왕의 명령이 이해된다.
황국사관과 중화사관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한국사의 대륙성과 해양성을 되살리는 데 있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조국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는 비단 역사학이라는 한 학문 분야에 국한된 과제가 아니라, 해방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면서 방향을 상실한 우리 사회에 미래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륙과 해양을 상실하고 좁은 반도에 갇힌 채 그 반도마저 남북으로 가르고 다시 동서로 갈라 싸우는 이 분열의 시대에, 대륙성과 해양성의 복원은 미래를 향한 통합적 지향점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이 말 달리고 배 달렸던 그 광활한 대륙과 해양을 바라는 마음으로 통합된 공동체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또한 우리 시대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황국사관과 중화사관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한국사의 대륙성과 해양성을 되살리는 데 있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조국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는 비단 역사학이라는 한 학문 분야에 국한된 과제가 아니라, 해방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면서 방향을 상실한 우리 사회에 미래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륙과 해양을 상실하고 좁은 반도에 갇힌 채 그 반도마저 남북으로 가르고 다시 동서로 갈라 싸우는 이 분열의 시대에, 대륙성과 해양성의 복원은 미래를 향한 통합적 지향점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이 말 달리고 배 달렸던 그 광활한 대륙과 해양을 바라는 마음으로 통합된 공동체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또한 우리 시대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황국사관과 중화사관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한국사의 대륙성과 해양성을 되살리는 데 있다. 그것은 우리 선조들의 조국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이는 비단 역사학이라는 한 학문 분야에 국한된 과제가 아니라, 해방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면서 방향을 상실한 우리 사회에 미래의 지향점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륙과 해양을 상실하고 좁은 반도에 갇힌 채 그 반도마저 남북으로 가르고 다시 동서로 갈라 싸우는 이 분열의 시대에, 대륙성과 해양성의 복원은 미래를 향한 통합적 지향점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이 말 달리고 배 달렸던 그 광활한 대륙과 해양을 바라는 마음으로 통합된 공동체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 또한 우리 시대의 임무가 아니겠는가.
<당의통략>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조들을 만날 것이다. ‘당쟁’에 초점이 맞추어진 만큼 부정적 모습도 많이 드러날 것이지만 그 또한 우리 역사의 일부분인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율곡의 ‘조제론調劑論’이 거부되면서 격화되기 시작한 조선 당쟁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 정치권의 모습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당론黨論’이 ‘국론國論’보다 우선할 때 어떤 부작용이 일어나는지를 현재의 당인黨人들이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 책을 다시 세상에 내놓은 보람이 있을 것이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가 1962년 북에서 간행되면서 북한 사학계에서 ‘낙랑군=평양설’은 자취를 감추었다. 중국의 방대한 문헌 사료는 물론 중국에서 출토된 여러 고고학 사료들을 가지고 고조선의 강역이 때로는 중국 하북성까지 걸쳐 있다가 요녕성으로 후퇴했다고 논증했는데, 평양 부근의 일부 고고학 유물들, 그것도 일제의 조작설이 만연한 고고학 유물들을 근거로 ‘낙랑군=평양설’을 펼치는 주장은 더 이상 학문적으로 설 자리가 없었다.
《고조선 연구》 8장의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본 고대 조선 문화의 분포〉에서 리지린은 중국 요서·요동지역 의 고고학 발굴결과까지 광범위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중국 요령성 지역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들을 가지고 고조선 강역이 지금의 요서지역까지 차지했다고 주장했으며, 방대한 문헌 사료는 물론 다양한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대륙 고조선설과 한사군 요동설을 주장했다.
이처럼 북한 학계는 해방 후 거의 15년 이상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거쳐 ‘낙랑군=요동설’을 확립시키면서 ‘낙랑군=평양설’을 무너뜨렸다. 남한 학계가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논쟁다운 논쟁 한 번 하지 않고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낙랑군=평양설’을 100년 전에 확립된 ‘정설’이라고 우기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채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를 번역하면서 느낀 것은 북한의 역사학자 들은 해방 직후부터 자신들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초반에 일제 식민사관은 말할 것도 없고, ‘대국주의 사상’, ‘대국주의 사가’ 등의 용어로 중화패권주의 사관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나아가 중국의 대국주의적 봉건 사가들과 조선의 사대주의 사가들의 학설이 일치한다고 비판한 것도 새로웠다.
지도교수인 북경대 고힐강 교수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맥은 흉노’라는 고 교수의 설도 조목조목 비판하는 학문적 기개 앞에선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남한과 북한을 막론하고 우리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면 갖게 되는 필연적 역사관이지만 그 시기가 1960년대 초반이었던 것이다.
《고조선 연구》가 우리 학계의 고질병이 된 친일·친중 사대주의 역사관을 청산하고 우리의 관점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는 한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그간 교과서에서 주입시킨 북한의 역사학, 고조선의 실체가 궁금했던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조희승은 북한 역사학계가 임나일본부설을 검토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바로 우리나라[북한]에서 《임나일본부》설을 깨뜨리기 위한 연구 사업은 조선고대사 체계를 재정리, 재확립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진행되였다.”
북한에서 조선고대사 체계를 재정리, 재확립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연구했다는 것이다. 남한은 거꾸로 조선총독부가 만든 ‘임나=가야설’을 확립시키라고 국고를 대주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는 ‘임나=가야설’을 주장하는 일제의 어중이떠중이들을 ‘사이비’라고 부르는데,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이 ‘사이비’학자들을 위대한 석학으로 높이면서, ‘임나=가야설’을 비판하는 민족주의 학자들을 사이비라고 매도한다.
(...)조희승은 “일제의 죄악에 찬 력사와 아직도 이런 사이비학설을 정설처럼 고집하는 일본인들의 후안무치함과 도적적 저렬성은 세계의 면전에서 낱낱이 까밝혀지게 되었다.”고 끝을 맺었다. 일제가 창시한 사이비학설을 은연중에 확대 재생산하는 남한 강단사학계도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반성하고 식민사관을 청산하는 것이 역사발전의 합법칙성일 것이다.
송시열에 대해 기술하겠다는 나의 결심이 송시열이란 신화가 만든 금기에 도전하는 것임을 지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우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우려는 지금까지 나왔던 송시열에 대한 글들처럼 그를 성인으로 만드는, 그럼으로써 서로가 좋고 좋은 그런 류의 글들이 아니라 그를 인간의 자리,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파탄에 대해 부채를 지녀야 하는 한 정치가의 자리로 그를 끌어내려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것임으로 알고 하는 우려이기도 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나는 송시열이란 인물에 대해 그간 역사 공부를 통해서 얻어진 역사적, 학문적 인식 이외에 어떤 예단이나 판단자료를 가질 만한 배경을 갖고 있지 않다. 송시열뿐만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나와는 학문 도상에서 만난 선인들일 뿐이다. 조선시대의 당쟁에 혈통적으로나 가문적으로 무관하다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이 송시열이란 금기에 대한 나의 기술에 정당성을 줄 수 있다고 변명한다면 나 역시 신화와 금기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자인하는 것일까?
현재 우리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아나키즘은 냉전의 세월을 뚫고 부활한 것이지만, 그 이전에 우리에게는 이회영과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있었다. 이 글은 바로 이들에 대한 기록이다. 절대적인 자유를 추구했던 이들답게 이회영을 비록한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의 삶은 드라마틱했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런 자료를 남기지 않아 이들의 삶을 추적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의 실제 삶은 이 글에서 묘사된 것보다 열 배는 더 드라마틱했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자료를 통해 말해야 하는 기술상의 한계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하지만 이들이 남긴 단편적인 궤적을 모자이크하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삶은 충분히 감동을 준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으며 이들과의 만남을 권하고 싶다.
그의 행적을 꼼꼼이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다. 대동법이 그중 하나다. 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 시범 실시했다가 100년 후인 숙종 34년에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대동법은 임란 때 유성룡이 작미법이란 이름으로 이미 시행한 제도다. 고종 9년 대원군이 강행한 호포법도 마찬가지다. 호포법실시 이후에야 양반들도 비로소 병역의무를 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무를 지웠다. 그뿐 아니라 천민들도 종군을 조건으로 면천해주고 나아가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주는 신분타파책을 실시했다.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을 침해하는 이런 정책들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 바로 여기에 유성룡의 실각을 둘러싼 의문의 해답이 있다.
사랑(舍廊)의 가장 큰 기능은 뭐니 뭐니 해도 대화의 장이다. 서민가의 사랑방이든 반가의 사랑채든 공통점은 대화의 장이란 점이며, 이를 통한 공론 형성의 장이란 점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큰 문제중의 하나가 대화의 단절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아프나 서구식 가옥 문화의 탓도 있을 것이다.
이제 사랑의 복원을 통해 대화를 되살려야 할 시점이다. 동네 처녀 총각의 연애 이야기부터 지엄한 나라님 정사의 득실까지 터놓고 이야기했던 대화의 시장, 즉 화장이 다시 서야 할 시점이다. 그간 사랑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묶어 상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모름지기 역사에는 교훈과 반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이를 자양분 삼아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와 환경의 한계는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도 있고 국왕에게도 있다. 역사가 감동적인 것은 그런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며, 때론 그런 노력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기 때문이다. 노력 여하에 따라 시대의 한계를 일정 정도 극복하고 성공한 국왕, 성공한 리더가 된 군주가 있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렇게 역사는 타산지석이 된다. 개인에게나 시대에나.
조선조 역관이 걸었던 길은 오늘날 외교전문가가 걸었던 길이자 종합무역상사의 무역전문가가 걸었던 길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갇힌 시대에 열린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 길에 시대의 미래가 있었다. 이런 역관들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미래를 점검하는 일이기도 하다.
'숙종은 미행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설화에서는 가난한 선비나 효자들을 도와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실록이나 각종 문집에 나타나는 숙종의 실제 모습은 전혀 달랐다. 그는 인(仁)을 표방했던 역대 임금들하고는 근본부터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살리기보다는 죽이기를 좋아하는 임금이어서 소론 출신의 우의정 윤지완은 숙종 20년 "인재가 나는 것은 한계가 있는데 형륙(刑戮:형벌로 죽임)의 재화가 계속 이어져 나라가 장차 텅 비게 되었으니 누구와 더불어 정치를 하시렵니까?"라고 항의할 정도였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숙종이 선정을 베풀기 위해서 자주 미행에 나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승려들의 새 왕조 건설 운동과 숙종의 미행을 연결시키자 비로소 이 사건의 형상화가 가능해졌다. ('머리말'에서)
'숙종은 미행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설화에서는 가난한 선비나 효자들을 도와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실록이나 각종 문집에 나타나는 숙종의 실제 모습은 전혀 달랐다. 그는 인(仁)을 표방했던 역대 임금들하고는 근본부터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살리기보다는 죽이기를 좋아하는 임금이어서 소론 출신의 우의정 윤지완은 숙종 20년 "인재가 나는 것은 한계가 있는데 형륙(刑戮:형벌로 죽임)의 재화가 계속 이어져 나라가 장차 텅 비게 되었으니 누구와 더불어 정치를 하시렵니까?"라고 항의할 정도였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숙종이 선정을 베풀기 위해서 자주 미행에 나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승려들의 새 왕조 건설 운동과 숙종의 미행을 연결시키자 비로소 이 사건의 형상화가 가능해졌다. ('머리말'에서)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역사는 유효한 나침반이 될 수도 있다. 역사의 나침반은 방향만을 대략 보여준다. N 극과 S 극 사이에서 정확한 방향을 잡는 것은 길을 찾는 사람들의 몫이다.
8.15의 시대정신이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실현된 지금 우리 사회가 갈등과 반목으로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 사회 공동체가 함께 추구할 미래의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역사에서 찾으려는 시도이다. 필자가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가 다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길 중에 우리는 한 길만을 선택할 수 있다. 그 길이 최선이었는지는 선택되지 못해서 버려진 길들이 훗날 우리의 선택이 최선이었다며 자신들이 버려진 것을 받아들일 때일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생각하기도 싫다. 그것은 우리를 역사의 패배자로 만들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 모두에게도 고통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