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20여 년 만에 나오는 첫 소설집이다. 노동조합 동료가 ‘전태일문학상’에 글을 보내보라고 했던 게 1997년이었으니 20여 년이 되었다. 소설 부문 상금 50만 원으로 조합원들과 술 마시고 나머지 17만 원인가, 북녘동포돕기 성금으로 보낸 기억이 있다. 그해 여름 연맹체육대회 때 경기지역 조합원이 다가와 악수를 청하며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했을 때 ‘아, 이런 걸 등단이라고 하는구나!’ 생각했었다.
글은 쉬지 않고 썼다. 어느 순간 이제 그만 쓰자는 생각이 들었다. 홍대 앞 거리 귀퉁이에 있는 두리반의 유채림 형에게 “형님, 그만 절필합니다” 했더니, 그냥 노느니 쉬엄쉬엄 쓰라고 했다. 글을 잊은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 문득 내가 작가였나? 이대로 끝내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좋아서 갈기듯 써왔지만 최소한 작가였다는 검증은 있어야 하지 않나? 그래도 20년을 썼는데. 혹시나 하고 경기문화재단에 창작지원금 신청을 했다. 다행히 지원금을 받았다. 아니었으면 영영 끝냈을지 모르겠다.
‘중동 이야기’라는 주제로 쓴 글이었다. 내 나이대 현장에 들어온 사람은 1970년대 ‘골드러쉬’처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중동에 다녀온 선배들 이야기다. 사람 목을 치는 할라스 광장, 모래바람에 휩싸인 현장, 그리고 중동 들개와 여우 이야기. 그 중심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주바일 항만 공사 현장을 불태운 폭동 이야기. 이 소설 속 이야기는 정주영의 회고록이 아닌, 직접 지켜본 사람들의 이야기다.
1983년 노가다 판에 들어온 내가 문학을 통해 나를 인식하기 시작한 첫 작품은 황석영의 「객지」다. 아, 이런 게 내 모습이구나! 하는. 「객지」의 ‘대위’는 내 안에 또 하나의 상징이었다. 노조에 가입하고 활동을 하면서 많은 ‘대위’를 봐왔다. 그래 ‘대위’가 있다면 중동으로 갔을 거야. 그곳에서 무엇을 했을까? 중동으로 팔려간 숱한 노동자들의 불편부당한 일이 있었고, 폭발했다면 그 안에 ‘대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이 글의 ‘김 대위’는 「객지」에서 건너온 활동가고 나머지는 선배들의 피어린 삶이다.
주바일 소요 사태는 당대의 정주영 회장과 이명박 사장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중동 신화의 절정이었던 주바일 항만 공사 현장에서 일어난 소요 사태는 전쟁 후 돈이 되면 뭐든 해야 했던 민중들을 대상으로 열악한 작업환경과 저임금으로 돈을 챙긴 기업 때문에 일어난 충돌이다. 주바일 이후 이명박은 사장에서 서울시장으로 대통령을 거쳐 감옥까지 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 이면에는 피와 땀으로 점철된 밑바닥 노동자가 있었다. 그 기나긴 기간 동안 건설노동자는 중동에서 다시 남한 땅으로, 늙어 쓰러질 때까지 이 사회 밑바닥에서 허덕이고 있다.
시인인 박일환 형이 내가 쓴 글 중 이 작품을 쳐주었다. 좀 더 다듬어서 작품을 만들라고 등을 떠밀곤 했다.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군에 입대하기 전 아들놈이 “아빠 책 나오면 보내주세요!” 했는데,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는 시점에 책이 나오게 되었다.
참으로 늦었지만, 그 뜨거운 사막에서 소금 물고, 소금보다 더 지독한 폭언과 착취를 견디어야 했던 선배들에게 여기 잡다한 자신들의 이야기가 꿈에서나마 땀을 식히는 작은 위로가 됐으면 한다.
시장에서 싹튼 노동의 뿌리 저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기운을 느끼고 새 삶으로 돋아나는 노동의 열망을 받아 온몸으로 전하는 그런 소설을 쓰려고 했다. 세상의 부당한 일들은 힘찬 노동을 왜곡시킨다. 그런데도 역사의 거친 마디가 될 사건을 피하지 않고 얼굴 앞에서 펼쳐지는 아픈 신음을 소설로 처절하게 느끼고자 했다. 먼지 속에서 함께 밥을 먹고, 서로 격려하고 고통을 안아 주며 어깨에 손을 얹어주는 그런, 공장 한 귀퉁이 동료의 부르는 따뜻한 목소리 같은, 미싱 소리 가득한 복도 꺾어져 가는 시다 아이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사랑한 한 사람의 삶을 쓰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