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 살자고 너무 멀리 와버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다.
내 곁엔 늘 벼락만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모두들 나를 떠나갔다.
아니, 떠나보냈다.
이젠 그마저도 덕분으로 알고 살 것이다.
덕분에 나는 살 것이다.
라고, 썼던 2009년의 나의 자서(自序)는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다.
2021년 11월
고영
처음 시인이 될 때
더도 덜도 말고 시집 딱 세 권만 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느덧, 벌써, 세 권째다.
뿌듯함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서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사이 나는 참 많은 사물들에게 빚을 졌고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쳤다.
시집 세 권만 내고 말기에는
갚아야 할 은혜가 너무 크고 무겁다.
이런 이기적인 내가
점점 좋아지고 있는 작금이다.
2015년 2월
원고지를 놓고 막상 책상에 앉고 보니 무엇을 쓸 것인가 그대에게 못다 한 진정의 편지를 쓸까 하늘에게 사죄의 말씀을 쓸까 달리의 늘어진 시간에게 안부나 물을까 막상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 지난여름 내게만 사납게 들이치던 장대비가 원고지 칸과 칸 사이를 적시고 목적지도 없는 폭풍의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끌고 가는 기-인 강물 위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푸른 달이 반짝 말라비틀어져 비로소 더욱 눈부신 은사시나무 잎이 떨어진다 지난 과오가 떠오르지 않아 얼굴 붉히는 밤 수천 마리 피라미 떼가 송곳처럼 머릿속을 쑤신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그리운 것들 원고지를 앞에 놓고 보면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전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