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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노창수

출생:1948년, 대한민국 전남 함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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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논증의 가면과 정신의 허구>

논증의 가면과 정신의 허구

나는 오래전부터 시조가 ‘서정의 파워’와 ‘운율의 룰’이란 자질에 함의한다고 여겨왔다. ‘서정’과 ‘운율’이란, 내용과 형식에 의해 구분하는 또 다른 이름이겠다. 둘은 분리되지만 통합되는 일은 더 많다. 시와 시조에서 ‘내용’인 ‘파워’와 ‘형식’인 ‘룰’을 통합해 보던 때, 교재와는 다르게 가르치던 국어 교사 시절을 생각한다. 난 ‘내용↔형식’의 교류에 터하여 학생의 수용을 바랐다. 한 텍스트를 두고, 상호 ‘수용⇄반응’하는‘ 학습자 중심’ 수업은 형식과 내용을 함께 수용함으로써 통합적 정서를 기를 수 있다는 나름의 생각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시조와 독자, 비평과 독자도 이 같은 각 정서의 교호작용의 상에 놓인다. ‘서정’과 ‘운율’은 바늘과 실의 관계처럼 등가적(等價的)이다. 이에 반해 ‘파워’와 ‘룰’은 불평등과 평등, 또는 방임과 규율처럼 상등적(相藤的)이다. 시조평론은 시조와 독자의 소통에 완미를 바라며 ‘시인의 정서’가 ‘화자의 서정’, 그리고‘ 독자의 감정’에 작용함에 있어 등가냐 상등이냐 무관이냐 하는 그런 나사의 모양과 크기에 맞게 깎아가는 일이다. 나는 이러한 여러 나사들로 제작·조립된 기계를 설비하고 지상(誌上)에서 수확한 낱알들을 씹기 좋도록 까끌한 부분들을 도정(搗精)해나가기를 번복해왔다. 내 평설에 의해 정미(精米)된 작품이 독자의 밥솥에 안쳐져 찰진 밥으로 상에 올려질 것인가, 그 긴장의 순간이 좋다. 그게 제3의 글로 드러나고 사람들이 호응해올 때 비평의 보람을 느낀다. 내 곡괭이 끝에 채굴되고 인용된 시조가 눈부신 광택으로 수렴되는 때는 미친 듯 힘이 솟아나 한 사나흘 굶어도 배고프지 않다. 해서, 오늘도 노트북 마당 앞에 부려진 그 암반 같은 작품들을 펜의 망치로 잘게 부수어 살피기를 반복한다. 이 고질은 잠을 반납하는 것은 물론, 패혈증 같은 병을 각오하게도 한다. 밤새 깊이 읽기에 신이 나 온갖 시집을 다 꺼내 읽거나 막장도 무서워 않는 광부처럼 기억의 단층을 뚫어 나간다. 그게 고통이라지만 내가 좋아서 하냥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쩜 이덕무가 말한 ‘간서치(看書痴)’로 유폐되어 스스로가 블랙홀로 흘러 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 책머리에

토박이의 풍자 시학

어쩌다 우리는 본질을 잃어버렸을까요. 유행을 쫓는 요즘 세상이 너무 감각적이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사람들은 예전과 달리 그런 자신을 발견하며 놀라지도 않습니다. 당연하다고. 심지어 이를 주도하지 못해 안달하는 경향이 있지요들. 사탕 맛을 본 아이가 어머니의 젖 맛을 잃고 우는 것처럼 이미 그 달콤함에 익숙히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제 몸에겐 오히려 해가 된다는 걸 모르니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지갑이 명품인들 비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빈 지갑을 내보이듯 시인 정현종은 문명에 자리를 내준 본질적인 자연에 대한 아쉬움을 「깊은 흙길」이란 시에서 노래한 적이 있지요. 실속이 없는 지구상은 이제 ‘깊은 자연’은 사라지고 ‘얕은 문명’만이 남은 황폐한 현상이라고 비꼰 것입니다. “흙길이었을 때 언덕길은 / 깊고 깊었다 / 포장을 하고 난 뒤 그 길에서는 / 깊음이 사라졌다 숲의 정령들도 사라졌다”(정현종, 「깊은 흙길」) 사실 시인이 지적한 대로 길은 옛 흙길이었을 때가 좋았습니다. 포장을 하고 난 뒤부터는 자연 냄새, 사람 냄새가 사라진 길이었거든요. 자동차만의 길은 감각적인 길입니다. 속도가 우선이지요. 그러니 깊고 무거운 숨을 쉬는 자연의 길은 이미 아니지요. 자연의 길은 본질입니다. 포장된 길, 문명화된 길. 여유와 여백이 없어진 길에서 우리네 삶은 가파르다 못해 지금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정국이 옷 로비 건에 휘말리던 때가 있었습니다. 민생 해결이 본질임에도 이를 뒤로 밀쳐두고 정치는 숫제 옷타령이었지요. 익히 보아온 대로 옷은 감각적인 물건입니다. 옷이 추위나 더위를 막는 본래의 기능과 목적을 운위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군요. 대부분의 옷 자체가 사치의 대명사니까요. 사실 옷이란 체온을 유지하게 한다는 본질적 기능은 어디로 가버리고 멋의 대상으로만 남았습니다. 수많은 멋진 옷 때문에 청렴이란 고어사전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낡은 용어가 되고 말았지요. 근본과 본질은 생각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일에만 매여 있는 경우를 비유한 예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쓴 청렴주의자 이덕무의 글이 생각납니다. “눈 속에 서 있는 옛 누각은 단청(丹靑)이 더욱 새롭게 보이고, 강 가운데서 듣는 피리의 곡조는 갑자기 높게 들리는 법이니, 밝은 빛과 곡조에 구애되지 말고 흰 눈과 맑은 강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박찬호나 김연아, 빌 게이츠 같은 발군(拔群)의 인물에서도 우리는 한낱 성과만 보고 탄성을 지릅니다. 이른바 ‘그림자 효과’나 ‘깃털 보기’에 연연해하는 것이지요. 그들이 왜 그처럼 성공하게 되었는가, 또 어떤 뼈 깎는 고생이 있었는가 하는 ‘몸체론’ 즉 삶의 본질을 잊어버립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인내와 극기 과정, 말하자면 정신적 성찰이 없는 것이 문제이지요. 단말마적인 물질 문명관이자 외표로만 인식하려는 우리 고질적 병폐라고나 할까요. 옛말에 “따스한 봄날 물가의 오리는 봄을 즐기면서 깃을 다듬고, 먼 산의 날랜 매는 멀리 창공을 내려다보며 발톱과 부리를 가다듬는다”고 했습니다. 봄을 즐기는 오리나 창공의 매는 자신은 정작 아름다움을 모르는 법입니다. 다만 그는 예비의 날을 준비하기 위해 단련하고 있지요. 겉보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이를 멋있다고 보고 있을 뿐입니다. 차제에 문학가는 자신의 창작에 ‘깊은 자연’의 본질이 없는 ‘얕은 문명’의 결과적 상황만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성공적인 대중성보다는 그 결과가 있기까지 생의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번 평론집엔 그런 과정으로서의 아픔과 진통이 꿰어진 글을 안내합니다. 하지만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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